담양 관방제림과 죽림원을 찾아서 / 차영섭
하늘도 높고 푸르러라. 곡식들을 익히고 단맛을 집어 넣느라 햇볕도 따가운 초가을의 문턱에서 우리 내외는 들놀이 나간다. 이번 주는 담양에 있는 관방제림(官防提林)과 죽녹원(竹綠苑)에 마음 놓았다. 광주 문화동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에 담양이 있고 담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걸어서 20분이면 관방제림에 이른다. 처음 길이라 물어물어 찾아가는데 이곳 사람들의 여유로운 표정과 길을 가리켜주는 친절함에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그 향기가 그지 없이 감미로웠다. 저런 여유가 어디서 나올까. 돈이 많이 날아다니는 도시도 아닌 곳에서 산에 샘물이 솟듯 싱그러움이 바로 욕심을 버린 텅 빈 마음에설까. 이런 저런 생각에 천연기념물 제 366호로 지정된 관방제림에 이른다. 천 눈에 반했다. 멋드러진 생김새와 의젓한 자태가 고풍스러웠다.
담양읍을 감돌아 흐르는 담양천의 남쪽 언덕을 따라 200살~ 400살 짜리 나무들이 서 있는데, 자세히 보니 이조시대 심었다는 명품 177그루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푸조나무가 대부분이고 느티나무, 팽나무, 은단풍, 벚나무로 구성되어 있다. 푸조나무와 느티나무, 팽나무는 그 생김새가 엇비슷하여 얼뜻 보면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고 이들 나무는 벚나무에 비해 몸체가 아직도 싱싱해 보였으나 벚나무는 삶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꾸준히 군청에서는 오래된 나무 사이사이에 같은 종류의 나무들을 매년 보식하여 대를 이어 가고 있고, 푸조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가지를 땅아래로 축 늘어뜨린 것이 마치 버들가지 같았다. 이 관방제림은 폭이 대강 100여미터 되는 담양천의 수해를 막기 위해 심었다 한다.
나무 사이사이를 지나가 보니 새마을운동 때 개량한 스래트 지붕과 화장실 위에 놓여진 김치 항아리, 울타리를 감싸고 있는 호박들이 옛 정취를 자아내고 있고, 총무정(總武亭)이란 담양 궁도인의 훈련장과 군데군데 쉼터가 평상 모양으로 놓여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한 할아버지가 우리 둘 곁에 오시어 평상에 앉으시더니 아무 말씀이 없다.
조금 후 다른 할아버지가 오시니 반갑게 맞이하시고 오손도손 말씀을 나누신다. 게중에 덩치도 크고 몸도 성성한 푸조나무를 가리키며 " 이 나무가 한 400살 쯤 되었다지요. 튼튼한 걸 보니 아직도 오래 더 살겠습니다." 하니, 80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께서 빙긋이 웃으신다.
같은 나무라도 어떤 나무는 삶이 버거운지 마냥 드러누우려고 하고 있고, 어떤 나무는 원기 왕성하게 오늘 하루를 하늘을 우러러 살고 있다. 나무들이 서 있는 맨 끝쯤, 아내와 나는 베낭을 풀고 평상에 앉아 사과와 포도송이를 따며 노랗게 물들어가는 논을 바라보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득 여기 어딘가에 대나무숲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그리로 가기로 했다.
되돌아오며 물으니 바로 옆에 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니 죽녹원이란 대나무 산이 보인다.
죽녹원은 담양군청에서 관리하는 대나무숲이다. 대나무는 음이온을 발생해 뇌 활동을 활발하게 돕고, 풍부한 산소를 방출해 걱정과 긴장을 완화해 주고 심신을 안정시킨다고 한다.
대나무는 4군자의 하나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옛부터 문학이나 철학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너는 누구냐?
원자폭탄이 떨어져도 살아나는 대나무야,
고엽제를 뿌려도 살아있는 대나무야,
지구상에서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성질이 곧고 곧아서 앞만 보고 사는 고도의 집중력을
지닌 너의 향기가 그윽하도다! 대바람 사이로 바람인 듯 아닌 듯 대숲에 앉아 있노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구나.
대나무는 죽순 발순 후 15~20일에 하루 1미터 이상씩 다 성장한다고 한다. 소나무 성장 속도와 비교해 보면 대나무 1시간 성장이 소나무 30년 성장과 같단다.
담양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강천사(剛泉寺)로 향했다. 담양에서 버스를 타고 순창을 거쳐 강천산 군립공원이 종점이다.
순창은 나 어릴 적 큰 이모님께서 살았던 곳이고,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겨울에 이모님 댁에 가서 노란 물고구마를 먹던 추억이 사르르 살아난다. 어디쯤일까, 지금은 하늘 먼 나라로 가신 이모님 사시던 곳이....나를 퍽이나 예뻐하셨던 그 모습이 아롱아롱, 버스는 순창을 지나가고 있다. 산 입구에 들어서니 마지막 가을을 슬퍼하는 매미들의 힘 없는 울음소리 들리고 굴참나무가 가로수를 누비고 있는 산길은 잔모래가 깔려있어서 모두들 맨발로 걸어가고 있다.
길 한쪽엔 계곡물이 흐르고 중간중간에 인공이지만 폭포수가 흘러내려서 정경이 한층 아름답다. 계곡 웅덩이에는 키우고 있는 송어 떼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사목사목 걸어간다. 운동화를 양손에 들고서. 300살 짜리 모과나무가 있는 그 길 옆에 강천사가 있다.
첫 길인지라 마한시대에 적과 싸워 승리한 곳이라는 구장군 폭포를 바라보는 정각에서 잠깐 쉬고 다음에는 이 산을 넘어 담양호로 갈 여운을 남겨놓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산 벼랑을 이어 만들어 놓은 판자길을 따라 내려왔다.
대나무에게
맑은 물 같다, 새들이 없는 것이
소낙비 빗줄기 같다, 땅에서 하늘에 이어진 것이
구름속에서 나오는 햇살 같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갈 것이
천 같다, 뿌리가 흙속에 얽힌 것이
향수를 바른 아가씨 같다, 코로 스며드는 너의 향기가
아내의 얼굴을 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