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과 처음
글/김덕길
시월이 갔습니다.
붉은 시월이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에 못 이겨 져버렸습니다. 언덕배기를 붉은 단풍으로 물들이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바람 한 움큼이 몰아치는 찰나였습니다. 딴 애는 노랗게 물드는 잔디가 추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단풍잎은 자기 옷을 벗어 남을 덮어주며 자기는 하나도 춥지 않다고 우깁니다.
노란 시월은 거리거리 메마른 보도블록에 서글픈 눈물 떨어뜨리며 더디 가라 외칩니다. 물 먹은 노란 은행잎이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릅니다. 성긴 빗물이 와르르 내리면 은행잎도 빗물에 묻어서 우수수 내립니다. 바람에 소리를 묻으며 은행잎은 소리 없이 낙하합니다.
꼭꼭 숨어버린 햇살이 오늘은 신종인플루엔자에 걸렸는지 감감무소식입니다. 하늘은 마스크도 쓰지 않고 구름 모아모아 쓸쓸한 시월의 마지막을 적십니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노래 ‘잊혀진 계절’을 따라 부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마지막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마지막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제 가슴은 천근만근입니다.
마지막으로 보내는 편지라며 자기는 모델이 꿈이라서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훌쩍 떠나버린 학창시절의 그 편지를 나는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는 면회라며 펄펄 내리는 눈길을 뚫고 버스조차 끊긴 길을 애써 달려와 손은 시리지 않으냐고, 귀는 왜 그리도 빨개진 거냐고, 왜 그렇게 춥게 입고 있느냐고 자기 끼던 장갑 벗어 내 손에 끼워주며 호~불어주던 그 사람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둘러보는 집터라며 불에 타버린 시골집 그 잿더미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시울 글썽이던 어머니의 마지막 고향의 이별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생전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자고 내 얼굴 가까이 내밀었을 때 이내 숨이 멎은 채 사연 많은 이승의 시간을 내려놓은 아버님의 임종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을 생각하면 기쁜 일보다 슬픈 일로 점철된 날이 더 많았습니다.
이제 다시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본적 있습니까?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목련보다 더 흰 자태로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그 첫사랑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처음 외가댁에 그녀가 놀러 왔을 때 나와 같은 또래의 여자 조카도 있었다며 나는 반말하고 그녀는 존대하는데 참 어린 삼촌이, 촌티 풀풀 나는 삼촌이 자기랑 동갑이라고 재미있어 죽겠다며 오랜 시간 친구처럼 대해주던 그 조카를 나는 잊지 못합니다.
처음 동호회 모임에 나갔을 때 수십 명의 친구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며 네가 덕길이냐고 물으며 반겨줄 때, 세상에 내가 이렇게 많은 친구와 격의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시간도 있다는 생각에 나조차 감격해서 어쩔 줄 모르던 그때를 나는 잊지 못합니다.
처음 시집을 출간했을 때, 처음 소설을 출간했을 때, 처음 등단했을 때, 처음 사회를 보았을 때, 처음 내 집을 장만 했을 때, 처음 당신을 만나 결혼했을 때, 처음 장가계를 갔을 때, 처음 대박이 났을 때 등, 내가 잊을 뻔했던 내 생의 처음을 나는 잊지 않으렵니다.
생각해 보니 처음은 늘 설레고 기쁘고 즐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 사는 동안에 늘 처음처럼만 살기로 해요. 당신을 처음 만날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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