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논에 대한 추억을 더듬으며
글 차영섭
하늘이 하도 맑아서 하늘을 잡으려 집을 나섰다.
버스에 몸을 싣고 담양을 지나서 순창에 있는 강천산으로 가는데
메타세쿼이어(Metasequioa) 가로수가 구름처럼 깔려 하늘이 초록이었다.
그 길 밖에는 파란 하늘과 노란 들녘이 대조를 이루었는데
추수하는 농부들과 서 있는 벼들, 누워있는 벼들이 옛 추억을 일으킨다.
이 나라의 생명을 이어온 저 벼는 처음 어디서 왔을까.
동인도에서 압록강을 건너왔을까, 남아시아에서 배를 타고 상륙했을까.
저마다 볍씨를 등에 지고 사람이 없는 골과 골로 가서 짐을 풀고 집을 짓고
살다보니 한 집 두 집 늘어나 마을이 되고, 다시 이웃에 또 촌락을 만들며
볏논이 점점 넓어졌겠지.
나 어릴 적만 해도 볏논엔 많은 생물들이 함께 살았었다.
우렁이, 메뚜기, 방아깨비, 피라미, 붕어, 미꾸라지, 왜가리, 휘파람새, 풀무치, 팥중이, 콩중이,
각종 유충들이 있었고
저렇게 벼를 베고 나면 힘 잃고 비실비실한 메뚜기며 이미 겨우살이 간 우렁이 구멍이 펑펑 뚫려 있었다.
손가락을 넣어서 우렁이를 잡아 된장국을 끓이면 그 맛이 일색이었다.
하늘이 알아서 비를 잘 내려주시면 무슨 걱정이 있으랴만, 잠시라도 잊고 때를 놓치면 기우제를 지내며
시름에 쌓여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다가 단비를 주시면 논물을 대랴 이웃끼리 물꼬 싸움도 일어난다.
그래서 논 구석에다 둠벙을 만들어 물을 저장하고, 가뭄이 오면 두래질을 해서 논에 물을 댄다.
더운 여름철에는 둠벙에 나가 미역을 감고, 낚시도 하고, 물을 다 퍼내면 수렁을 헤집으며 미꾸라지며
붕어를 잡곤 했다.
벼는 참 이름도 많다. 아주 어릴 적에는 모라 하고, 좀 크면 벼라 하고, 알갱이를
나락 또는 뉘라고 하고, 맺으면 이삭이라 하고, 홀태로 털고 나면지푸라기나 짚이라 하고, 껍질을 벗기면
쌀이라 하는데 한 번 베끼면 현미, 두 번 베끼면 백미라 하며, 밥하는 쌀을 멥쌀, 찰 진 쌀을 찹쌀이라 한다.
밥을 어르신에게는 진지라 하고 제삿밥은 메라 한다. 나락 한 알을 유심히 보면 흰 구슬 같기도 하고 아침
이슬 같기도 하다.
벼는 하얗게 꽃이 피고 옥수수꽃마냥 바람이 불면 이내 떨어지기 쉽게 간들간들하다. 바람의 중매로
벼 알이 오동통 배부르고 뜬물같이 젊은 날에는 참새들이 찾아와 깨물어 먹는 통에 허수아비가 등장하고
깡통 부대가 논을 뱅뱅 돌며 후여~후여~ 두드려야만 했다. 한 시절이 지나면 벼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금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고개를 숙일 때에야 참새들도 벼논에서 자취를 감춘다.
벼는 우리 민족의 생활에 많은 이로움을 주었다. 주식으로서 뿐 아니라 지붕이 되고, 땔감이 되고,
신발이 되고, 소의 사료가 되고, 썩이어 퇴비가 되고, 그리고 된장에는 곰팡이를, 새끼를 꼬아 각종 생활
도구를 만드는 필수품으로서의 재료가 된다. 어찌 이 뿐이랴. 코 흘릴 적에 벼를 베고 나면 논이 유일한
운동장이었다. 볏짚을 똘똘 말아 축구공을 만들어서 축구를 했고, 달 밝은 밤이면 벼낟가리 사이사이를
돌며 술래를 했다.
이제 그립던 추억은 어디로 갔나. 모두 사라졌다. 벼들이 농약에 녹초가 되어 누워있다. 그렇지만 다시
옛 것을 찾으려는 친환경 운동이 슬슬 고개를 드니, 실오라기 같은 희망 하나를 품어본다.
실상과 상상을 즐기는 여행( 송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