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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유적지를 찾아서
차영섭 (시인)
계절의 여왕 5월은 하남 문화원생들을 봄나들이 불렀다.
옛 백제의 숨결이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리는 논산으로.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비가 올 듯 말 듯 흐렸으나, 버스 2대로 출발하기 위해 남한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는 문화원생들의 표정은 밝았다.
계획된 출발시간은 다가오고 이어서 버스가 출발하자, 사무국장의 대략적인 답사 소개와 문화원장님의 인사말이 있었고, 일행은 그간에 쌓였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버스는 즐겁게 달렸다.
1. 논산 명재 고택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조선 숙종 때 학자인 명재(明齋) 윤증(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300년 된 ‘논산 명재 고택’이었다. 노성산의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집 뒤에는 적송들이 푸르게 푸르게 옛 선비의 넋을 기리고 있었으며, 집 앞에는 너른 들판과 구불구불한 길이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즐거이 맞아들일 신호 같게도 보였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사는 고요한 고택 옆 자리에는 몇 백 년을 지탱해온 고목들과 200여 년을 유지해온 장맛을 자랑하는 항아리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더욱 옛 정취를 고풍스럽게 뿜어내고 있었다.
고택은 앞의 사랑채와 안쪽의 안채, 행랑채로 구성되고 매우 청빈한 주택이었다. 사랑채는 바깥세상과 공개되고, 당당한 형태를 갖지만 안채는 완벽히 폐쇄되고 무표정하였다. 사랑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커다란 연못을 조성하였으며 백일홍 2그루가 옛 모습을 재현이라도 할 듯이 꽃을 피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고택의 특징은 안채와 행랑채가 ㄷ자형을 이루며 대청, 누마루, 고방 등으로 배치되어 검소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사랑채 벽에는 군곤고와(君困高臥)라는 액자가 걸려있었고, 하나의 문을 미닫이와 여닫이로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미닫이 2중문이 독특하게 설치되어 있으며 문짝을 열면 바람이 통하게 걸어놓는 4분합문도 있어 해외에서도 유례가 없다는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명재 윤증선생은 유계, 권시, 김집, 송시열 등과 고명한 학자에게 수학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숙종은 우의정에 임명하고 사관을 보내어 임명장을 전하였으나 14번의 상소를 올리며 끝내 사양하여 후진교육에 힘썼다 한다.
2. 종학당 (宗學堂)
두 번째로 들른 곳은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는 조선시대 파평윤씨의 문중 서당인 종학당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교육 기관으로 향교와 함께 서원, 서당과 같은 사학이 성행했다. 향교는 관에서 운영하였고, 서원은 사설기관으로 양반자제들을 가르쳤다. 지방의 명문가에서는 문중 자제들을 위한 종학당을 세워 교육하였는데, 문중서당으로 대표적인 곳이 1643년에 건립된 파평윤씨 종학당이었다. 당(堂) 뒤에는 역시 적송들이 고풍을 자랑하고 있고 병사리 저수지 건너 편 앞산에는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데 학생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면 선조들에게 제의를 드리고 조상의 은덕을 기렸다 한다.
인조 21년 사계 김장생의 제자인 동토 윤순거(1596-1668)가 종학당을 설립하고 문중의 자녀들을 모아 가르쳤던 곳이다. 다음 해에 현재의 위치에 정수루(淨水樓)와 백록당(白鹿堂)을 지어 강학의 전당으로 삼았고, 종제와 종약을 제정하는 등 규범을 엄격하게 세워 교육하였다.
종학당 내에는 초학자들을 교육하는 종학당이 있고, 강당인 보인당, 가장 높은 곳에 백록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사서삼경을 중점적으로 교육하고 과거시험 준비를 하였다.
당시 문과 급제 인원이 총 14,624명인데 이 종학당에서 42명이 급제했다니 가히 대단했음을 본다. 몸가짐으로부터 정신 자세와 학문을 두루 교육시켜 배출한 이곳이 바로 현대판 사관학교였다. “ 사람은 백지와 같다. 그림 그리기 나름이다.”라는 죤 록크의 사상이 그대로 깃든 조상의 지혜를 맛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3. 관촉사(灌燭寺)
점심 식사를 하고 식당 바로 뒤에 있는 관촉사로 걸어 올라갔다.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논산시 관촉동 반야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국내 최대 석불상이 있다. 고려 광종 때인 968년 혜명이 창건하여 40년만에 완성하였고 법당은 1386년에 건립하였으며, 석조미륵 보살입상은 보물 제218호로 지정돼 있다. 석불 규모는 높이 18m, 둘레 9m, 귀 걸이 3.3m, 관 높이 4m로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쓰고, 그 위에는 이 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는 청동으로 풍경이 달려있다. 불상은 자연 화강암반 위에 별석으로 요부이하와 상체와 요부를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고, 가슴 좌우에는 가늘고 긴 돌을 연결하여 양완을 만들고 머리에는 구름무늬 같은 머리카락을 조각한 그 위에 팔각형의 관을 만들었으며, 관 위에는 이 중의 보관을 만들어 네 귀에 청동제 방울을 달았고 보관 아래 부분에는 복판팔엽연화를 크게 조각하였다. 이 하나의 불상을 만들기 위하여 180톤이나 되는 이렇게 큰 돌을 어떻게 이 높은 산 중턱까지 운반하였는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흩어진 민심을 불심으로 모으고 구제 받지 못한 인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최대 역량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화에는 고려 광종 때 사제촌의 한 여인이 반야산 서북 모퉁이에서 봄날에 고사리를 꺾다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가보니 어린아이는 보이지 않고 땅속으로부터 큰 돌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며 집에 가서 사위에게 그 사실을 말한 바 사위가 관가에 고하였고, 조정에까지 보고되었다. 그리하여 광종은 불상을 조성하라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전국에 널리 알리고 불상을 만드는 장인 100여명을 승인 혜명에게 명하여 이 대석불을 조성하였다 한다.
4. 탑정호
논산에는 8경이 있다. 제1경은 관촉사요, 제2경은 탑정호요, 제3경은 대둔산이다. 제4경은 계백장군 유적지며, 제5경은 쌍계사, 제6경은 개태사, 제7경은 옥녀봉, 그리고 제8경은 노성산성이다. 이 8경 중 하나인 탑정호는 버스로 달리며 보았다.
1939년 일제시대에 큰 가뭄이 들어 흉년이 들자 일본은 당장 군량미 부족으로 시달리게 되었고, 그리하여 1941년 저수지를 만드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는 3년 후인 44년에 완공되었으나 일본은 패망하고 말았다. 전국에서 예산의 예당저수지와 함께 2번째로 큰 저수지다. 주목적은 농업용수로 쓰기 위함이요 이 일대는 모든 농사는 이 물로 짓고 있다.
호수 면적이 152만평, 제방길이 573m이며 철새들의 낙원이고 붕어, 쏘가리 등 어종도 풍부하다 한다. 탑정리 석탑은 본래 현 저수지에 수몰된 지역에 위치한 어린사(漁鱗寺)라는 절터에서 옮겼다고 하며 왕건이 남쪽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 이곳에 주둔하며 절을 지었다. 호수를 빙 돌아 소나무들이 천년 역사를 뽐내고 있었다.
인근 대둔산에서 흐르는 물을 저장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한다. 탑정호를 한 바퀴 돌아 계백장군 유적지와 백제 군사박물관으로 향했다.
5. 계백장군 유적지와 백제 군사박물관
계백장군 유적지에는 계백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충장사와 계백장군의 묘지, 그리고 백제 군사박물관이 있다.
계백장군은 의자왕대에 성충. 흥수와 더불어 백제의 3충신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장수로, 백제 역사에서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계백장군은 의자왕 20년(660년) 7월 여름 나당 연합군 5만여 명이 사비도성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결사대 5천여 명을 이끌고 황산벌(현재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신암리 일대)에 나아가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삼국사기 열전 계백조는 계백의 최후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 한 나라 사람이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당해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지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 하여 가족을 모두 죽이고 전장에 임했다 한다. 죽음을 각오한 백제군은 먼저 황산벌에 도착하여 세 곳의 험한 요충지에 진을 치고, 세 갈래 길로 진격하는 신라 김유신의 군대를 맞아 네 번이나 승리했다. 그러나 신라군은 관창(官昌)같은 어린 화랑들의 죽음에 힘입어 사기가 올랐으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마침내 계백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백제군은 패하고 말았다.
백제 계백장군의 묘는 당시 주민들에 의해 매장한 것으로 전해오는데 주변에는 백제장병들의 영혼마냥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호위하고 있고, 장군의 묘는 쓸쓸히 지금도 황산벌을 지키고 있다.
백제 군사박물관은 2000년 설립 계획을 수립하여 2004년 9월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건립되었고, 주요 시설은 3개의 전시실과 정보검색실, 실내.외 체험실 그리고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유물과 영상, 그래픽, 디오라마 등을 통해 백제 군사와 호국이라는 독창적인 주제를 가지고 전시하고 있다. 현재 유물 248점, 기록화 5점, 영상 8편, 모형 28식, 패널 58식 등 총 347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실물 복제분 전시와 영상물, 그래픽 등을 활용한 전시 연출은 시각적인 효과와 예술적 요소까지 가미하여 관람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있다. 군데 군데 해당화는 호국 영령들의 넋으로 피어나고 있다.
6. 돈암서원(豚巖書院)
사계 김장생(1548-1631)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11년(1633)에 충남 연산면 임리에 건립되었으며 효종 10년(1659)에 사액되었다. 서원은 훌륭한 분들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교육기관이며,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원래 이곳에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 현재 숭례사에는 김장생 선생을 주향으로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고종 8년 전국 서원 훼철령에도 철폐되지 않고 70개 서원 중 47개만이 남은 그 중 하나로 보존된 유서 깊은 서원으로 고종 18년에 이르러 숲말(임리)의 서원이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뜰 앞까지 물이 차 지대가 높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 서원은 효종 10년에 이어 현종 1년 재차 사액을 받았다. 사액을 두 번 받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과 1년 만에 같은 이름으로 재사액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돈암서원은 기호사림의 적통이자 당대 최고의 사림으로 존중 받았으며, 그를 제향한 대표적 제향처로서 구심체가 되었다. 김장생 선생과 김집 선생 부자의 학문을 칭송하고 건물의 구조와 의의를 적은 비석으로 돈암서원 원정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4,168편의 책판이 있었으나 전란의 피해와 분실로 현재 2,103판만이 보존되어 있는 장판각이 있다.
7. 개태사(開泰寺)
마지막 답사지인 개태사에 도착했다. 대한불교법상종인 개태사는 논산군 연산면 청호리 소재 천호산 자락에 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자이다. 936년(태조 19년)에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을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려 황산을 ‘천호산,이라 개칭하고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조 시대에 퇴락하여 폐사로 있던 것을 1930년 김광영이 새로 지었다. 국가의 변고가 있을 때마다 중신들이 호국기도를 드리던 고려시대 최대의 호국수호사찰이었으나 우왕 2년부터 3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으로 방화 약탈되고, 원수 박인계가 이곳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개태사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지금 개태사 경내에는 미륵삼존불상과 5층 석탑, 개태사 철확, 창운각, 우주각 등이 있다.
이로써 하남문화원 춘계유적지 답사를 모두 마쳤다. 모심기철이라 논에 논에는 물이 가득차서 가을에 풍년을 기원이나 하듯 하늘의 모습을 그윽히 품고 있었으며, 귀가하는 문화원생들은 흥에 겨워 절로 어깨춤을 추고 있다. 매년 일 년에 두 번씩 봄 가을에 유적지 답사를 하고 있는데, 문화원생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기회를 제공해 준 문화원과 시청의 지원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그러나 매번 예산 부족으로 수도권에서 가까운 지역만 중복해서 답사하고 있는데, 금년 가을부터는 좀 예산을 늘려 영호남 지역도 답사할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문화원생들의 유적지 답사는 질서 정연하게 통제에 잘 따랐고 진지하였다. 하남이 백제 문화의 발상지라는 측면에서 백제문화의 후기 지역을 이끌었던 충남 논산 일대를 답사하며 백제문화의 동류성을 함께 느꼈던 뜻 깊은 하루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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