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무르익던 계절에 / 차영섭
40년 전, 나는 양구 동면 대암산 자락에 있는 어느 부대에 처음으로 부임했다.
광주에서 초급장교 기초 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현리를 거쳐 양구를 지나 동면까지
일행은 줄곧 군 트럭으로 비포장도로를 달렸으니 먼지가 차안에 수북이 쌓였다.
내가 근무할 부대에서 논두렁으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외딴 마을에 나는
방 하나를 얻었다. 밥 세끼를 부대에서 먹고 오직 잠만 자기 위한 것이었다.
겨울 초입에는 월동준비라야 고작 산에서 나무를 베어 장작개비를 쌓아두는 일이 전부였다. 눈보라가
씽씽거리며 휘몰아치는 밤이면 홀로 지새는 이 밤이 얼마나 쓸쓸했던지 모른다. 무슨 일이 그리
많았던지 일요일도 없이 근무하고 야외훈련에다 주번근무에다 나의 휴식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퇴근 못하는 날이 많았지만 퇴근해도 자정 무렵이었다.
집에 오면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시간 남짓 지나야 온기가 느껴지니 나는 개지도 않은 이불 위에 엎드려
사랑편지를 쓰곤 했다. 한 번에 10장이 넘으니 봉투가 먼저 임신한다. 보낼 때마다 방벽에다 바를 정(正) 자를
그려놓았다. 정이 방을 한 바퀴 돌고 또 돌면 벽에는 그리움의 꽃이 피고 난 그 꽃잎에 꽃술이 된다. 글로도
보내고 호랑이나 대나무나 난도 그려 보내고 온갖 짓을 다 했던 것 같다.
부대에 부임하기 전에 그대를 단 한 번 보고 편지만 쓰다가 월남 전장으로 갔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언제 오시느냐고 물으면 가봐야 안다는 양구, 인제, 원통이 그 때만해도 비포장도로에
교통 상태가 안 좋아서 서울을 하루에 왔다 갔다 할 수 없는 거리였다. 아침에 출발하면 노을이 노을노을
해서야 목적지에 도달했다.
편지 쓰는 일이 사랑의 전부였고 나머지는 그리움에 쌓여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가끔씩 아주 드물게 답장이라도 받는 날이면 그날은 입이 함박꽃처럼 피는 봄날이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근일 년이 넘게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웃음이 끊길
날 없고, 대화가 중단 되지 아니 하며, 모든 시간이 멈춰 버리고, 길고 긴 시골 길 같은 편지를 쓰는가 보다.
요즈음은 메일이나 메시지나 전화로 아무 때나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어서 그리움이라든지 애타는 마음이
덜하리라.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일년 후 나는 월남 전장으로 떠났다. 아무 소식 없이 또 일 년이 지나가고 나는 귀국
해서 다시 만났다. 월남에서 온 나는 까맣게 거슬렸지만 그 사람만은 하얗게 보였다니 사랑의 눈은 검은 것도
하얗게 변화시키는가 보다.
신혼 생활이 시작된 곳은 강원 철원 신수리다.
밤이면 북한 방송이 웅웅 들려오는 곳, 봄에는 무논에서 개구리가 귀 날아가게 울어대던 곳, 동네 화장실이
논 가운데 있고 장마 때는 안마당에 이끼가 안개처럼 끼던 곳, 거기서도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 퇴근했다.
퇴근이라야 자정쯤이다. 자정에 군화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땅울림을 하면서 가까워지면 귀를 방바닥에 대고
기다리던 아내의 가슴에 뭉클한 그리움이 찾아왔다고 한다. 칠흑같은 밤에는 두려움이 홍수처럼 몰려오고,
방에 누워 천정 사이로 달빛이라도 비추는 밤에는 고요함이 은은하여 눈물이 고였다고 했다. 사랑은 이렇게
애타는 기다림과 설레임과 어떤 망설임 속에서 익어가는 과일인가 보다.
가정을 꾸리고 함께 살면서 어디 좋은 일만 있으랴. 가끔 말다툼이라도 하고 출근하는 날이면 으레 내가
먼저 전화를 해서 묶였던 가슴을 풀어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애탈 마음이 안쓰러워서 가능하면 빨리 푸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신혼 때 아파트나 그럴듯한 방 하나 없이 인근 전방 마을에 아무 방이나 얻어 살면서
고생시켰던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었으니까. 비가 와서 젖은 나무를 아궁이에 지필
때면 오소리 잡을 연기가 부엌에 자욱한 눈물 고인 눈과 겨울에 얼음을 깨고 아기 기저귀를 개울에서 빠는
얼은 손과 시장에 갔다가 진흙탕 마을길을 아기 업고 걸어오는 모습들을 생각해본다. 그 때만해도 이삿짐
센터가 없어서 이사할 때 먼 거리는 열차편으로 부치곤 했으니 그 고생이 오죽했으랴!
나 어찌 잊으리오 그 시절을, 그 때를 생각하며 나를 새롭게 하고 나의 죄를 씻는 아름다운 추억을 길이길이
간직하겠다. 무르익은 열매가 씨앗이 되어 새봄을 맞이하듯이 언제나 푸르게 살겠다.
현실이 독이라면 그 옛날은 언제나 나에게 약이었으니까.
부부가 함께 살면서 가장 고생했던 과거를 일으키며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오늘에 벌어질 틈을
때우는 좋은 재료가 되며, 사랑의 강물이 마르지 아니하고 유유히 흐르게 한다.
"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좋아요 "란 시를 당신께 보내드립니다.
당신은 포도송이
내 입이 달콤합니다
당신은 여름 숲바람
나를 시원하게 해 줍니다
당신은 달밤에 가을 귀뚜라미
나에게 노래가 됩니다
당신은 파도 치는 바다
나를 크고 힘있게 해줍니다
당신은 가을 들판
내 마음을 풍성하게 합니다
당신은 아침 태양
나를 어둠에서 구해줍니다
당신은 펄럭이는 깃발
언제나 조국과 함께 합니다
그런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줘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부부유별 夫婦有別 